새 중국의 첫 집단농장 - 성화 집체농장

도랏뉴스2019-07-12 09:01

새중국 창건 70년 풍우세월을 회고하는 성화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해돋이 아래 일렁이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격의 릉선이 따로 있다. 그것은 성화 사람들이 공산당의 령도하에 일떠세운 새중국 첫 집단농장이 공화국 력사의 정중한 기록속에 번영하는 이 시대와 함께 70년 세월을 영광한 희광으로 빛내왔기 때문이다.


현재 성화촌 모습.


원래 이 고장은 일본무장개척단이 들어와 ‘화천토지주식회사’를 내세워 개발농장을 꾸려놓고 군량미 공급을 꿈꾸었던 곳이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놈들은 논에 물도 대보지 못하고 화천땅에서 쫓겨났다.


1948년 해방된 성화벌이 완전이 인민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합강성정부직속으로 ‘화천수리기계화 시범농장’이 정식 가동되였고 벌리, 밀산, 림구, 연변도노하에서 300여호 조선족 농민들이 제일 먼저 수리농장에 와서 정착했다. 그것은 동북대후방근거지건설 대안의 하나였고 성화의 선대들이 북대황 대초원에서 수리기계화 대농의 봄물을 터뜨린 시원이 되였다.


1949년 3장(지금의 성화조선족향 홍광촌)에서 조직된 ‘김백산모범집경조’의 정장이 호황을 맞으면서 첫 집단농장을 잉태한 모태로 되였다. 소농경제란 중국에서 수천년 뿌리박고 자란 황무지의 잡초나 다름없는데 남남끼리 모여서 같이 일하며 산다는것이 절대 수월할수가 없다. 그러나 김백산과 성화 선대들이 선택한 길은 곧 생산합작화의 길이였다.


1951년 3월 첫집단농장의 36세대가 3장을 떠나 눈, 얼음이 낀 한족마을인 건국촌 부근에다 초막을 세우고 새로운 마을을 (9장) 세운것은 첫 집단농장이 운명 정착에 사활을 걸었던 창업 고투였다. 그해 성화농장에서는 국가에 근 55만근의 벼를 판매하고 정무원으로부터 ‘전국 량식 다수확상’장려를 받았다. 그들이 피땀을 흘리며 일궈놓은 그 떼장판 자리에서 천만섬의 벼가 쏟아져나와 대뜸 나라의 희사로 된 것이다. 성화집단농장은 중국사회주의 농업합작화운동사에 화려한 력사지표로 되였다.


1953년 성화농장마을 전경.


1951-1957년사이 성화농장은 당초의 36세대 농호가 209세대로 늘어났고 토지면적도 당초의 99헥타르에서 528헥타르로 확대 되였으며 헥타르당 벼 평균 수확고는 8300근이상으로 재해년을 빼면 평균 만근이상 생산량을 냈다. 국가에 판매한 벼도 당초의 54만여근으로부터 300만근이상으로 증가 되였는데 인구당 해마다 5000근이상 벼를 국가에 판매했다. 당초 성화농장에서 국가에 판매한 벼가 전국량곡징구량의 900분의 1이라고 하니 성화집단농장의 생산성이 국내 최고였다. 그때 성화집단농장의 성장 속도는 구소련 20년 집단농장발전수준에 이르러 50년대 ‘중국 제1촌’의 신화로 엮어져 새중국 농촌의 아침을 깨웠다.


상장을 수여 받은 성화사람들.


그 리유로 성화농장은 전중국은 물론 사회주의 우호국가에서도 다 알아볼 수있는 중국의 첫 명촌이였다. 1952년 3월24일 ‘인민일보’는 이름도 미처 짓지 못한 ‘한 집단농장의 성장’을 대서특필하며 전중국에 성화를 알렸다. ‘인민일보’는 ‘그 집체화가 전중국농민들이 모두 행복하고 문명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유일 정확한 방향이다’라고 제시했다. 그 뒤를 이어 성화농장의 창업기적은 각지 신문, 화보, 교과서와 그림책의 이야기로 씌여졌고 방송에 보도되였고 영화로도 제작되였다. 50년대 국내외에서 3만여 명 관객이 성화를 찾아 참관고찰과 견학을 했으며 국내의 많은 행업단체가 성화농장과 우호관계를 맺고 도농통합과 우의를 발전시켰다.



당과 국가에서는 새중국에 많은 최초를 기록한 성화농장 개척 공신들을 국가대사에 불러주군 했다. 그중 김백산(1920-1962.6)은 선후 전국로력모범(1951, 1953년), 제1, 2기 전국인민대표(1954-1964), 건국 3주년 전국소수민족참관단 대표(1952년)등 많은 영예를 따냈다.


1955년 7월 29일 그는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 참가하여 농민대표의 신분으로 대회에서 발언까지 했다. 그는 성화땅에서 제일 먼저 북경에 가서 모택동, 류소기, 주덕, 주은래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고 인생최고의 호사를 누린 개척영웅이다. 성화농장의 다른한 개척자 리재근이 (1920-2006) 김백산을 만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천생인연’이 되였다. 김백산과 달리 리재근은 글을 아는 사람이였고 속에 ‘우황’이 들어찬 사람이다. 잔말이 없고 집착에 능했는데 한사람은 앞에서 한사람은 뒤에서, 한사람은 생산기계화에 한사람은 과학영농에 혼신의 땀과 지혜를 모아 사업했는데 둘은 갈라놓고 볼 수 없었다. 김백산의 일욕심과 담략, 리재근의 모략과 집착이 성화농장의 개척창조 정신으로 단조되였다. 그시대 농장마을에는 또 뭇별같은 존재로 영예의 군상을 이룬 개척공신들도 너무 많았다. ‘손공정사’라고 불리운 농토개간의 신 손경도, 청춘불패의 청년대표 태윤선, 리창석, 강정구, 건국녀성 김채금, 리정숙, 리영숙, 태련옥, 농기계수리사 정구흥, 리근수 허창준, 축목수의 관리 한창범, 리진우, 오인화, 생산능수 신자성, 도재암, 리성림, 최광호, 렴봉섭, 강동훈, 로농 신성천, 리충원 등 분들은 모두 농장마을 개척기에 각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던 생산 능수들이다. 그들의 군체적인 투혼이 없었다면 성화집단농장의 성장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풍작을 거둔 성화사람들이 탈곡을 하고 있다.


성화집단농장을 ‘새중국 최초’라고 하는 것은 꼭 남보다 이름을 먼저 지었다고 해서 따낸 말이 아니다. 그 성공실천이 새중국에 먼저 농업합작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 당시 나라가 크게 흥할 징조로 돋보였다. 그런 리유가 아니라면 중앙정부 민족위문단이 1952년 8월에 북대황 허허벌판의 한 조선족농가마을까지 찾아와서 방문하는 사례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팽택민 단장이 집체농장에 수여한 금기에는 조, 중 두가지 문자로 ‘중화인민공화국 각 민족은 단결하자’라는 글이 수놓져 있다. 그것은 그 시대 ‘새중국 제1촌’의 신화를 쓴 성화사람들이 가슴뜨거운 희열이였고 일떠선 새중국이 광명과 열정 힘을 심어주었던 진실한 기록이였다.


1958년 10월 전국적으로 ‘대집체’, ‘전민소유’의 인민공사화가 실시되면서부터 성화농장의 행락은 끝나버렸다. 유감스러운 력사 좌절이였건만 성화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않고 분발 매진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나라의 거대한 힘을 느끼며 믿어왔기 때문이다. 70년대 성화의 농사혁명은 성화사람들의 당의 령도하에 다시 한번 집체화생산지혜를 발휘하여 하늘땅과 싸워이긴 력사의 새로운 도약으로 되였다.


성화향은 흑룡강 성내에서 제일 먼저 벼생산 량종화를 실현하고 벼잡교기술, 새로운 선종범, 비닐하우스육모법, 도열병방지, 논판관리에 모두 일류의 선진농법을 도입했다.


1965-1995년 30년간 성화촌에서 국가에 판매한 징구량 벼는 4185만근을 초과했다. 그것은 그 시대 성화 사람들이 땀과 피를 흘리며 300헥타르 전면적에 손모를 꽂아서 따낸 근로의 결실이였다.


80년대 성화촌은 탄탄한 집체경제를 토대로 남먼저 문화주택을 건설하고 성내 첫기의 문명촌으로 흑룡강성 새농촌건설선진집체의 영예를 따안았다. 그것은 또 그 시대 성화정신의 눈부신 도약이였다.


그 중심에는 뿌리깊은 ‘재근현상’이 현대화의 성화인상으로까지 남아 있다. 공화국 장자로 민족의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김백산 집체농장때와도 달리 인심불고의 희비역경을 독파하며 고행 속에서 알찬 열매를 거둔 사람이다. 50년대 삽자루 농사군이 세기의 문턱을 넘어설때까지 전국로력모범(1979년), 전국 3, 4, 5기인민대표 (1964-1983년), 농민육종가, 철학가, 고급농예사 직명까지 가지고 장족한 영예 행진을 이어왔다. 역시 성화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던 리유이기도 하다.



개혁과 개방 새로운 발전시대에 성화촌 촌민들은 한국과 국내 각지에 진출하여 창업가도에 올라 풍만한 삶을 살고있다. 성화촌 새마을건설은 정부의 자금지원에 힘입어 촌민들의 생활조건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였다. 지금 전촌 촌민들은 모두 생활 시설이 구전한 아파트단지에 입주하여 도시민 생활을 하고 있다. 촌 중심에는 문화종합건물과 실외 체험광장을 새로 지었는데 성화촌으로 오고가는 손님들에게 이 시대 성화현상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은 성화촌이 앞으로 력사문화 명촌으로 거듭날 밝은 전망이다. 어제날 농부살이로 한평생 살아온 성화인들에겐 그것은 시대의 새로운 감동이며 새로운 꿈이다.


감동 70년, 성화의 불꽃은 새중국 성장과 함께 우리 민족의 이름으로 눈부시게 빛나왔다.


/박룡수 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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