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에 작별의 아쉬움, 리별의 고통 있다

좋은글2019-10-23 08:37

수필-작별과 리별


고홍영



1


나는 지나온 세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작별하고, 리별했다. 예민했던 신경도 이젠 좀벌레가 갉아먹은 고목처럼 슴슴하고 느슨해졌다.


작별은 서로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인사를 나누고 헤여짐으로 하여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 적어도 모르는 척하거나 어색하지는 않다. 리별은 누가 먼저 선택했든, 어떠한 객관적 원인이 있었든 아픔이나 유감이란 매듭을 지어준다.


오늘은 작별과 리별이 공존하는 하루였다. 회사에서 11년간 근무한 직원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사표를 냈다. 그리고 모멘트에서는 멀리 미국에 가 있는 대학동창이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와 작별을 고하는 글을 읽었다. 아마도 이것은 리별이라고 생각된다. 눈 감는 마지막 순간에 얼굴 보지 못하고, 작별인사 나누지 못하고 서로 다른 세상으로 갈라졌으니.  


홀로 이국타향에 가 있는 사람들은 리별의 고통을 겪어 보았을 것이다. 가족간의 생리별은 이 세상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이며 제일 큰 아픔이다. 더이상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으니. 이러한 리별은 누구든 피하고 싶으나 또한 별다른 방도가 없는 부득이한 고통이리라.


2

요즘에는 직장에서 거의 매달 작별과 함께 새로운 만남도 있어서 서로 평행을 이루는 와중에 또 조용히 아무 기별 없이 찾아오는 '생리별'도 있다.


친하던 친구끼리 가끔은 대화방(위챗)에서 열렬히 잡담도 하고 롱지거리도 하고 다음에 만날 모임을 토론하다가도 갑자기 불 켜진 채로 잔잔한 침묵에 빠질 때가 있다. 그나마 대화방에서의 침묵은 사람이 많으니까 누가 이렇고 저렇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냥 요즘 흐름이 그렇다고, 아니면 모두 갑자기 다른 일이 있은 거라고 여길 수 있다.


1대1의 대화인 경우는 서로 보이지 않는 공간인만큼 잠수 타면 그만이다. 썩 오랜 시간 후에 답장해도 거리낌 없고 아예 답장을 하지 않아도 뻔뻔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잠수를 선택한 일방이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리론적으로 답장을 할 의무나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은 그런 선택을 했기에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리해되고 '용서'도 된다. 그렇지만 진지한 문제를 물었거나 사연을 피력한 후에도 좀체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생리별'을 통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다에 돌 던진 격으로 아무런 파문도 없는 '바다'를 바라만 본들 어찌하겠는가? 이런 '생리별'을 몇번 당하고 나면 오랜 친구간의 감정도 연기처럼 날아가 버린다.


SNS는 말 그대로 사회적 관계 개념을 인터넷 공간으로 가져온 것이다. 즉 오프라인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네트워크를 통해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개인을 표현하는데 보다 쉽고 빠르며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접속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형체없는 리별의 원흉이 결국에는 SNS의 발전과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현상이라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하지만 아픔은 없을지라도 '생리별'의 원인을 모르는 것이 답답하다. 답답한 건 그래도 아픔보다는 나으니까 그냥 참는다. 오히려 작별에 느슨해진 신경을 자극해 죽어가는 세포들을 재생시켜줄 수 있다.


3

이렇게 '생리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온라인상에서도 오프라인처럼 인사하고 갈라질 수 있는 리상세계를 그리고 있는 나, 지금 이 시각에도 느슨해진 신경세포들을 하나씩 재생시켜 줄 또 새로운 만남과 작별, 리별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살아 있음에 만남의 즐거움이 있고 작별의 아쉬움이 있으며 리별의 고통이 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



댓글 쓰기
0 /255
게시
사용자 평가
더보기